molskin

2009년 3월 이야기.

조르지오 2009. 4. 2. 18:50
'믿음의 벽을 뛰어넘기를 시도해보고 싶어요."

그때는 분명 그런 마음이었다.

꽤 고민했던 것이었고,
꽤 오래찾았던 것이었고,

이성이 아니라, 분명한 직관이 왔기에
처음 만났을 때는 치켜진 눈과 각진 얼굴이
절 입구에서 말 없이 서있는 그냥 사천왕을 지날 때 같은 무신경의 범주 였기에

그런 것은 별 걱정이 되지 않았었다.

요구하는 것이 많아지기 시작했다.
과도한 친절이 시작되었고,
모든 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족이 붙기 시작했다.

내가 생각했던 믿음에 대한 걱정은 50만원 보증금에 대한 증서를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정도에 대한 문제였지.
평생가야 싫어했던 사람 꼽으라면 딱 한 손에 들어가던 성격이니

사람이 행동할 것에 대한 걱정따위는 하지 않고 있었다.
아니 할 수 가 없었다.

또 하나의 온실이었던 건가.

믿음의 벽은 넘어섰지만
사람에 대한 벽이 높아졌다.

세상을 품을 수 없겠다는 죄책감이 울컥거리고 올라와서는
그 사람이 나쁘다고, 어이가 없다고 변명해내는 마음이 더 짜증이나서

내가 나에게로부터 빨리 도망치고 싶다.
사실,
이런 궁색하고, 작은 것에 주절거리고, 한심하게 뻣대는 나에게로부터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.

나에게는 고 3때 고명옥여사라는 담임선생님이 있었다.
생각해보면, 그녀와의 전쟁 속에서, 그녀의 행동들을 생각해보면
그녀가 얼마나 나로부터 지옥같은 일년을 버텨냈을 까 했다.
그녀에게는 내가 지옥이었다.

그녀가 어느 날 그랬다.
' 현인군자인 척 하지마! '

그녀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면, 나는 피식 웃고 있었다.
그러니까 나도 버럭버럭 짜증이나곤 했지만, 그녀가 더 괴로웠던 거 같다.

그래, 대부분 반장인 척, 다 내 몫인양, 쿨한 척 살려고 노력 엄청했던 거 같다.
징징대고, 짜증내고, 화내고, 투정부리고 그런 것들 결국 나를 더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넣기를
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을 기억해두고는 그러지 않게 되려고 무던했던 거 같다.

그래, 그래서 꽤 속 편하게 살고 있었다.
작았지만, 포부가 빵빵했던 간지가 좔좔이던 광고회사에서 짤렸을 때도 그랬고,
마이타이에서 김민준 '오빠' 호칭 사건 빌미로 짤렸을 때고 그랬고,
3개월의 여름 기술교육을 마치고,
'신민아의 프렌치 다이어리'며 잘 나가는 방송 쯤 내보내는 여의도의 프로덕션에서 새벽 12시에 짐 바리바리 싸들고 그만 둠을 
선포하고 택시를 타고 돌아왔던 12월의 겨울까지도 꽤 속 편하게 살고 있었다.

아마, 그런 척 했던 것이었겠지.

그 빌어먹을 쿨이 다 먼지. 
속시원하게 다 욕해버릴꺼야.

'니가 나빠!!!'

이해는 무슨, 얼어죽을,

'니가 나쁘다고!!!' 퇫퇫퇫.
'다 죽여버리겠다. 호이짜 호이짜.'

왠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같은 기분이군. 속이 다 시원하네. 이거.
다들 알겠지? 나 이렇게 찌질하다고!

'호이짜는 무슨 얼어죽을'

술이나 마시고, 정신차리자.